[프레시안] 『백년의 고독』,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만나다_<스페인어 번역교실> 번역가 조구호
- 2020.04.07
- |
- null
- |
- 강사인터뷰
'일본해' 항의 받고 고마워한 이유!
[내가 옮긴 책]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만나다
번역자의 작업은 고독하다. 번역자의 삶 또한 고독하다. 나 자신을 '번역자'로 지칭하는 것이 타당한지 모르겠다. 번역이 온전한 밥벌이 수단도 아니고, 삶과 열정의 대부분을 번역에 투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이 다양한 내 작업 가운데 으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진실이다. 번역자는 번역 대상 서적을 맨 먼저, 가장 정확하게 읽는 독자가 되는 행운과 특권을 독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부를 졸업하고 유학지로 선택한 곳은 콜롬비아다. 아마도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1982년에 내게 유발한 흥분과 기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학원 강의실에서 교수들을 통해 만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일반' 작가가 아니었다. 그는 '가보(Gabo)'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박사학위 논문은 가르시아 마르케스에 관해 쓸까 생각했지만, 당시 같은 과에서 공부하던 중국인 학자가 선수를 치는 바람에 다른 작가를 선택해야 했다. 존경하던 저명 문학교수가 가르시아 마르케스에 필적하지만 크게 조명 받지 못하고 있던 동시대 콜롬비아 작가를 연구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해 줌으로써, 그때까지만 해도 나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인연은 그리 깊지 않았다.
귀국 후 우연한 기회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에 관한 논문을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글 쓰는 사람들 특유의 여유랄까, 게으름이랄까? 발표일이 코앞에 다가오는데도 논문을 쓰지 못하고 있다가 하는 수 없이 한국어 번역본을 찾았다. 당시 영어 등 외국어로 번역된 것을 한국어로 다시 옮긴 '중역본'이 여러 권 있었는데, 번역이 가장 잘 되었다고 평가받던 어느 판본을 읽게 되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나라이자, <백년의 고독>의 무대가 되는 콜롬비아에서 중남미 현대소설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바가 많았다.
▲ <백년의 고독>(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를 해결해 나가다
<백년의 고독>의 번역할 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왕이면 기존의 중역본들보다 '훨씬 좋은' 번역본을 만들어야 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소설을 쓰느냐, 죽느냐"라고 되뇌면서 결기를 다졌는데, 나는 죽고살기로 번역에 매달렸다.
<백년의 고독>은 마술적 사실주의를 표방하는 작품으로, 사실주의라는 말이 의미하는 역사성·재현성과 '마술적'이란 단어가 함축하는 글쓰기의 실험성을 내포하는데, 이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야 했다. 작업을 하면서 구체적인 몇 가지 문제를 늘 염두에 두었는데, 그 가운데 두어 개를 언급하겠다.
<백년의 고독>의 문체를 주도하는 '구전 전통'을 살리는 것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여덟 살까지 외가에 살면서 천부적인 이야기꾼 외조부모로부터 까리베 지역의 특이하고 경이로운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고, 이들 이야기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세계를 풍요롭게 만드는 요소가 되었다. '천일전쟁'에 참여했던 외할아버지는 외손자가 아우렐레아노 부엔디아 대령 같은 '위대한' 인물을 창조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 외할아버지는 "이야기와 실재를 연결시켜 주는 탯줄" 같은 존재였다. 특히 외할머니는 그 지역의 신화, 전설, 민담 등을 이야기해 주었는데, 환상적이고 기괴한 것들을 실재와 결합시키는 독특한 서사 방식은 거의 외할머니 덕분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외할머니를 '마술적 리얼리즘' 소설의 스토리텔링에 영감을 불어 넣어준 인물로 기억한다.
이들 이야기가 <백년의 고독>에 충분히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번역에도 이런 구전 전통이 잘 드러나야 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삶은 한 사람이 살아온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기억하는 것이고, 그 삶을 얘기하기 위해 어떻게 기억하느냐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시피, 나는 작가가 <백년의 고독>에 형상화해 놓은('어떻게') 기억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해 주고 싶었다.
아주 특이했던 부분은 아마란따가 유난히 '고상을 떠는' 올케 페르난다를 놀리면서 한 말이다. "-Esfetafa esfe defe lasfa quefe lesfe tifiefenenfe asfacofo afa sufu profopifiafa mifierfedafa." 난해한 수수께끼였다. 여러 번역본을 참조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영문판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다음과 같은 번역문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피 애패는 자파기피가 싼판 똥퐁에페도 구푸역펵질필을 할팔 그프런펀 여펴자파야." 원문에서는 선행하는 음절의 모음에 'f'를 합쳐 한 음절을 만든 뒤 선행하는 음절 뒤에 삽입시키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단음절을 구성하는 's'와 'n', 'r'의 경우는 무시했다). 원문에서 'f'와 모음이 결합된 음절을 삭제하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Esta es de las que les tienen asco a su propia mierda." 한글 번역본에서도 이 같은 방식을 따랐다. 그런데, 한국어는 에스빠냐 어와 달리 한 음절이 '자음+모음+자음'으로 구성될 수 있기 때문에, 즉 받침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한국어 번역문을 만든 뒤, 선행하는 음절의 받침을 붙였다. 물론, 이 문장에서 독자들이 상당 기간 나와 동일한 고뇌에 빠져 있다가 결국에는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힌트를 주었는데, 이는 바로 '는', '가', '도', '을', '야' 뒤에는 'ㅍ'음이 들어간 음절을 삽입하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다음 문장은 번역서에 제공되지 않았다. "이 애는 자기가 싼 똥에도 구역질을 할 그런 여자야."
마침표 없이 3쪽에 걸쳐 이어지는 문장을 원문처럼 한 문장으로 옮기는 것도 '고역'이었다. 당시 <번역의 테크닉>이라는 책에 실린, 문장을 자의적으로 끊지 말고, 쉼표와 마침표도 중요하게 여기라는 '지침'이 나를 향해 비수를 들이대고 있었다. 나는 기나긴 시간 동안 고민을 거듭하면서 번역문을 원문처럼 한 문장으로 만들어냈다. 만용이었을까?
번역자는 책이 계속 출간되는 한, 그 책에 시선을 주는 독자가 있는 한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법인가 보다. 번역을 하면서 'el mar del Japón'이라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일본 바다', 한자어로 쓰면 '일본해'다. 얼핏 '동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일 간의 민감한 영해 문제 때문에 동해로 번역해야 한다는, '애국적'인 생각도 했다. 하지만 번역자가 그 바다를 동해라고 특정할 수도 없고, 또 만에 하나 정말 동해라 할지라도, 작가가 사용한 어휘를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한국과 일본의 영해 문제를 알았을 턱이 없지만, 설사 일본 편을 들었을지라도 말이다. 문학 (연구)에서는 작가의 오류, 무지, 편견, 이데올로기, 특별한 의도 같은 것도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이야기에 관한한 "나는 하찮은 공증인에 불과하다"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입장을 나 또한 견지하고 싶었다. 아니다 다를까, 번역서가 출간된 지 십여 년이 지났을 때, '동해'를 '일본해'로 번역해 놓은 '비애국적이고 몰지각한' 역자가 어디 있느냐며, 강력하게 질타하는 몇몇 독자의 글과 전화가 출판사에 전해졌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한국 독자에게 '재미의 미학'을 전하다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구사하는 "언어의 엄밀성, 경제성, 완벽성은 단 한 마디도 넘치지 않는다. 그 안에는 모든 것이 촘촘하게, 간결하게 짜여 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자신의 표현 수단을 완벽하게 인지한 독창적인 작가다. 그의 수학적이고, 절제되고, 기능적인 서사는 화산처럼 분출되는 호흡 같은 스타일로, 상상력의 가장 대담한 창조물들에 동작, 매력,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강력하고 번쩍이는 강으로 변해 있다."
2010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바르가스 요사의 말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재미의 미학'을 통해 작품의 대중화를 꾀함으로써 일반 독자를 확보하고 비평가들에게는 새로운 소설미학을 제공한다. <백년의 고독>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재미의 미학'이 무엇인지 오랫동안, 제대로 알려주기를 소망한다.
<백년의 고독> 해설, 마꼰도와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에 대한 탐구
1. '소설의 죽음'에 반기를 든 <백년의 고독>
그 동안 세계 문학계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던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20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소위 '붐 Boom' 세대의 등장과 더불어 서서히 중심으로 이동하기 시작하고, 콜롬비아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ía Márquez, 1927~ )를 비롯해 멕시코의 까를로스 푸엔떼스, 페루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등 일군의 작가는 뛰어난 작품을 통해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역량을 전 세계에 과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1944년에 <집 La casa>이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쓰려고, 현재의 <백년의 고독>에 실려 있는 첫 행을 썼지만 자신이 하려는 얘기를 스스로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테크닉적·언어적 요소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완성된 작품'으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23년 동안 생각하고 18개월에 걸쳐 집필한 <백년의 고독>이 1967년 6월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수다메리까(Sudamérica) 출판사에서 출판되어 전 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진다.
<백년의 고독>이 출판되기 전 여러 잡지가 일부를 게재하고,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읽어보라고 건네준 제1장을 읽은 멕시코 저명 작가 까를로스 푸엔떼스도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비평가들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즉각적인 성공을 거둔 이 작품은 현기증 나는 속도로 재판이 이루어지고, 출판된 지 몇 개월 만에 유럽의 20여개 언어로, 현재는 세계의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독자들, 특히 '고갈의 위기'에 처해 있는 작가들의 애독서가 되고 있다.
이런 성공 덕분에 이탈리아에서는 치안치아노 상을 수상하고, 프랑스에서는 가장 뛰어난 외국 소설로 선정된다. 미국 비평가들은 1970년대의 가장 훌륭한 열두 권의 책 가운데 하나로 선정하고, 컬럼비아 대학은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한다. 1972년에 작가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권위 있는 로물로 가예고스 상을 수상하고, 1982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 작품으로 소위 '소설의 죽음'이라는 주장에 반기를 들게 하고, 결국은 밀란 쿤데라로 하여금 "소설의 종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서구 작가들, 특히 프랑스인들의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동유럽이나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에게는 어불성설이나 다름없다. 책꽂이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꽂아놓고 어떻게 소설의 죽음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라는 말로 소설의 부활에 대해 언급하도록 만든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문학은 이제 라틴아메리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문학에서 확고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의 영향을 받은 다른 작품들까지도 독자의 아낌없는 찬사를 받고 있다. 세계의 수많은 비평가는 이미 세계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고, 앞으로도 노력 여부에 따라 문학사를 바꿀 가능성이 예견되는 그의 눈부신 글쓰기가 세계문학사의 멋진 순간을 장식하면서 21세기를 여는 초석이 될 것임을 의심치 않고 있다.
2. 마술적 사실주의: 또 다른 리얼리즘의 극치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제대로, 멋지게 표현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방법을 모색하던 라틴아메리카 소설가들은 역사적·문학적으로 큰 혼란을 겪어온 라틴아메리카만의 독특한 문학적 산물인 '마술적 사실주의(Realismo mágico)'를 고안해 낸다. 중남미학자로서는 아르뚜로 우슬라르 삐에뜨리가 1948년에 처음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지만, 이것을 새로운 사조로 규정한 사람은 앙헬 플로레스다. 쿠바 작가 알레호 까르뻰띠에르가 '경이로운 사실(Lo real maravilloso)'이라는 용어로 정의한 '마술적 사실주의'는 사실과 환상, 사실과 허구가 초현실주의적 수법으로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형태를 말하는 것으로, 좁게는 리얼리즘의 한 유형, 넓게는 세계 인식의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충분히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현실을 실제의 삶보다 더욱 폭넓게 수용하는 라틴아메리카에게 현실이란 개인 심리적·사회적·수평적·역사적·외면적 측면뿐만 아니라 집단 심리적·민화적·미신적·환상적·추상적·수직적·탈시간적·내면적 측면까지 포함한다. 바꾸어 말하면, 죽음의 세계는 삶의 세계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고, 부재와 현존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의 동시적 속성이며, 환상과 실제 사이에는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현실은 불가시적 세계로 둘러싸인 포괄적인 전체를 뜻하기 때문에, 소설 속의 수많은 에피소드가 일상적인 것을 환상적으로, 환상적인 것을 일상적으로 구사하는 문체와 서사적 관점을 교묘하게 융합시키고 있기 때문에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자신의 소설에 첨가한 신화적인 요소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실, 즉 고독을 치유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이해될 수 있다.
<백년의 고독>은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환상과 사실을 격리시키는 벽을 제거하는 데 무척 고심한 작품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어린 시절 외가에서 잘랐는데, 미신을 믿고 신비로운 것을 좋아하던 외할머니는 어린 가브리엘에게 환상적이고도 터무니없는 것을 아주 자연스러운 말투로 얘기해주었고, 가브리엘은 환상과 경이로 가득 찬 옛날이야기의 세계에 흠뻑 젖은 채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렇듯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분석적이고 증언자적인 태도를 배제한 채 대신 유년기부터 들어온 전설이나 신화로 포화되어 있는 잠재의식의 인도를 받아 <백년의 고독>에 그만의 필체와 서사적 관점을 사용해 현실과 환상을 교묘하게 융합함으로써 특유의 제3 현실, 즉 총체적인 허구의 세계를 창조해 냈다. 이런 창조적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 제3 현실은 독자의 개념적 세계를 환상적 세계로 대치시킴으로써 독자의 무의식이나 잠재의식 속에 엄연한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백년의 고독>의 마술적 장치는 실제로 작품을 읽음으로써만 풀 수 있는데, 작품에 나타난 예를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팔팔 끓는 얼음', '죽은 사람이 나타나 살아 있는 사람처럼 활동하는 모습', '흙, 벽에서 긁은 석회를 먹고 사는 레베까', '항해 도중 바다에서 잡은 용의 뱃속에서 발견된 십자군 병정의 투구, 허리띠, 무기', '난로에 얹어둔 우유가 끓지 않아 주전자 뚜껑을 열었을 때, 주전자 안에 득실거리는 구더기', '담요나 양탄자를 타고 하늘로 날아가 영원히 사라져 버린 미녀', '돼지 꼬리를 달고 태어난 아이' 등이다. 호세 아르까디오의 죽음(한 발의 총성이 울리고) 뒤에 일어난 현상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호세 아르까디오가 침실문을 닫자마자 권총 소리가 집 안을 권총 소리가 집 안을 진동했다. 한 줄기 피가 문 밑으로 새어나와, 거실을 가로질러 거리로 나가, 울퉁불퉁한 보도를 통해 계속해서 똑바로 가서, 계단을 내려가고, 난간으로 올라가, 아라비아 인 거리를 통해 뻗어 나가다, 어느 길모퉁이에서 오른쪽으로 돌았다가, 다른 길모퉁이에서 왼쪽으로 돌아, 부엔디아 가문의 집 앞에서 직각으로 방향을 틀어 닫힌 문 밑으로 들어가서는 양탄자를 적시지 않으려고 벽을 타고 응접실을 건너, 계속해서 다른 거실을 건너고, 식당에 있던 식탁을 피하기 위해 넓게 우회해서 베고니아가 있는 복도를 통과해 나아가다, 아우렐리아노 호세에게 산수를 가르치고 있던 아마란따의 의자 밑을 들키지 않고 지나, 곡식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우르술라가 빵을 만들려고 달걀 서른여섯 개를 깨뜨릴 준비를 하고 있던 부엌에 나타났다."
작가는 바나나 농장 노동자들이 노동 조건과 생존권 문제를 놓고 벌인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13명이 죽은 사실을 3000명이 죽었다고 서술하는데, 이런 과장에 대해 백년 후에는 3000명이라는 환상적 숫자가 역사적 숫자로 믿어지고 13명이라는 역사적 숫자는 믿기 어려운 환상적 숫자로 퇴색할 것인 바, 그 때는 사람들이 역사보다는 자신의 픽션을 더 신뢰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역사적 사실을 그 사실과 유사한 이미지를 통해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영역으로 이끌어 들인다.
가르시아 마르케스 자신이 "작가보다는 마술사가 되고 싶었다"고 했던 말은 그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표현하기 위한 기재로 차용한 마술적 사실주의와 연관이 있을 법도 하다. 마술사처럼 하는 것, 즉 현실을 무한히 확대하고, 재해석하려는 그의 시도는 <백년의 고독>에서 충분히 탐지되는데, 이 허구적 세계는 마술에 의해, 마술 속에서, 마술로부터 생성되고 파괴된다.
3. 유토피아적 공간: 나선형적 시간
사람 하나를 죽임으로써 고향을 떠난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가 아무도 닿지 않는 곳에 건설해, 부엔디아 가문의 6대에 걸친 영고성쇠, 즉 고통, 절망, 사랑의 결여, 백년의 고독이 펼쳐지는 마꼰도는 콜롬비아의 오지(리오아차, 시에나가 그란데)와 신화(원죄 이전의 축축하고 고요한 낙원, 마법에 걸린 지역) 등에 뿌리를 박고 있다. '마꼰도'라는 이름은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첫 소설을 쓸 때인 1951년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는데, 이는 그의 고향 카리브 해 연안의 원시적인 마을 아라까따까에 있는, 자신이 어렸을 때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는 농장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마꼰도는 신화적 레벨에 있어서는 에덴의 은유를 내포하고 있는 죽음이 없는 세계이자,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적 맥락에서는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발견된 신대륙 아메리카를 상징한다. 이런 이중 구조 안에서 마꼰도라는 곳은 고독이 재배하는 곳으로 장치된다. 우선 마꼰도는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변두리 마을과 일반적인 지방을 대변한다. 그러나 초기의 단절과 고립으로부터 식민화, 미제국주의화로 이행되는, '일탈' 또는 '전도(顚倒)'의 역사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주민들이 그때까지 알고 있던 그 어떤 마을보다 잘 정비되고 부지런한 마을"인 마꼰도는 여러 면에서 '에덴동산(무릉도원, 유토피아)'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자원이 풍부하고 위기의식도 없으며, 그 누구도 사망한 적이 없는 낙원인 것이다. 원시적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마꼰도는 점차 현대문명과 제도의 침투를 받으며 몰락하기 시작하고, 고독에 휩싸인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이 거주하는 고독한 마을로 변해 백년이 흐른 뒤에 결국 소멸하고 만다.
이처럼 현실적이고 신화적인 공간 마꼰도는 '직선적(역사적)'이고 '원형적(신화적)'인 시간이 중첩·혼합된 시간 구조, 다시 말하면 '나선형' 시간 구조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백년의 고독>에 내재된 핵심 테마인 '고독'을 찾아내는 데 열쇠가 되는 것은 직선적으로 진행되는 역사, 즉 마을의 설립과 발전, 쇠퇴와 파괴라는 역사를 보완하고 소설의 시간적 차원을 확장시키며, 새로이 생명력 있게 펼쳐지는 확장된 현재의 꿈을 담아내는 나선형적 시간, 다시 말하면 연속성보다는 동시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돌고 도는 시간, 직선적인 시간을 보완하고 소설의 시간적 차원을 확장시키는 시간과 부엔디아 가문에 총체적으로 선고되어 있는 고독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부엔디아 가문의 역사, 소설의 '고독한' 시간적 메커니즘은 "끝없이 반복되는 하나의 톱니바퀴, 그 축이 서서히, 고칠 수 없을 정도로 마모되지 않는다면 영원히 계속해서 회전하는 하나의 바퀴"이기 때문이다.
<백년의 고독>에는 수많은 등장인물과 사건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지만 진지하게 읽어보면 지속적인 흐름, 즉 시·공간 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리듬과 패턴이 발견된다. 불멸성을 찾아다니는 길가메시의 모험, 오디세우스의 귀향, 영원성을 추구하는 연금술사의 자기실현 과정, 성배를 찾아 떠나는 기사 이야기, 디오니소스적 광란의 축제 등, 일류가 시간을 통해 쌓아 올린 모든 문학적 경험, 다시 말하면, 수많은 민속 모티브, 신화, 에피소드가 도처에 중층적으로 융합되어 있다. 여성 주인공들, 특히 도덕성의 화신인 우르술라, 풍요와 성의 여신에 비유될 수 있는 삘라르 떼르네라('삘라르 Pilar'는 '기둥', '축'을 의미하고, '떼르네라 Ternera'는 '암소'를 의미한다.), 아마라딴(출산의 여신이나 처녀로 남아 있는 그리스의 대모신(大母神) 아르테미스를 의미한다) 등은 위와 같은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백년의 고독>에서 나선형적 시·공간의 문제를 가장 잘 드러내는 상징적인 면모는 '이름짓기'에서 비롯된다. 부엔디아 가문의 남자 자손들은 아우렐리아노 또는 호세 아르까디오라는 이름을, 여자 자손들은 우르술라, 아마란따, 레메디오스라는 이름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호세 아르까디오라는 이름을 지닌 남자는 충동적이고 모험적인 특성을 띠고 있으며, 아우렐리아노라는 이름을 지닌 남자는 명민하고 은둔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들 이름은 생물학적·심리학적으로 동일한 패턴의 특성을 계승해 나간다.
아우렐리아노는 부엔디아 대령이 일으키거나 겪은 서른 두 번의 반란은 콜롬비아 독립 이후 끊임없이 진행되어 온 좌·우 이데올로기의 투쟁사를, 4년 11개월 2일간 지속된 대홍수와 10년 동안 지속된 가뭄은 '낙원'에서 저질러진 타락의 정화와 다가올 신생(新生), 그리고 그 신생에 대한 소망의 무참한 좌절을, 고독을 상징하고 있으며, 이밖에도 10년 주기로 3월이면 마을에 찾아오는 집시들, 불길한 일이 일어나는 화요일들, 부엔디아의 집에서 일상적으로 되풀이되는 수많은 사건 또한 시간의 동시성과 순환성, 그리고 그 속에 내재된 고독을 상징한다. 특히 신화 속의 페넬로페를 연상시키는 아마란따가 낮에는 수의를 짰다가 밤에는 푸는 행위와 아우렐리아노('아우렐리아노 Aureliano'는 어원학적·상징적인 의미에서 라틴어의 'aurum 황금'과 연관이 있다)가 고독을 지탱하기 위해 황금을 녹여 작은 물고기를 만들고, 황금 물고기를 팔아 벌어들인 금화를 녹여 황금 물고기를 만들다가, 마침내 팔기를 단념하고 순전히 만들기만을 위해 황금 물고기를 녹여 다시 황금 물고기를 만드는 행위는 시간의 순환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마꼰도라는 실제적인 공간과 소설이라는 공간(양피지라는 공간)이 아주 교묘하게 얽히고 설켜 있는 <백년의 고독>에서 나선형적 시간의 특성은 죽음 - 라틴아메리카 사회가 선고받은 것처럼 보이는 정체의 운명 또는 수동적인 혼수상태 - 으로부터 시작해 과거로 회귀하고, 더 나아가서는 현재를, 미래를 열고 정립하는 생명의 순환고리를 연결해가는 데 있다.
4. 고독, 섹스, 근친상간: 마꼰도와 부엔디아 가문의 인간조건
<백년의 고독>에서 가장 특징적인 인물들은 마꼰도의 설립자인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로, 고독이라는 기호는 그들의 몸과 영혼에 나 있는 상처이자 종양이자, 가족의 혈통 속에 녹아 있는 피할 수 없는 인자라고 할 수 있다.
부엔디아 가족 가운데서 가장 고독한 인물은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다. 그의 고독한 운명은 태어나기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어머니 우르술라가 노령에 이르면 생기는 통찰력으로 아우렐리아노 대령이 어머니 뱃속에서 울었던 것은 "그가 사랑하는 데 무능하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생각했던 걸" 기억했듯, 그는 모든 가족 중에서도 타인과의 우정이나 내밀한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이 가장 많은 인물이다. 고독하게 자란 그는 나중에 보수파와 자유파가 벌인 '천일전쟁'의 영웅으로서 엄청난 권력을 소유하게 되어 "이제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남자처럼 보였을 때"도 백묵으로 그린 원 안에 스스로 격리된 채 '무한한 권력의 고독 속'에 위치하게 된다. 어떤 때는 그의 명령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미리 실행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르술라는 그의 과도한 권력이 거의 완벽한 도덕적 타락을 의미한다고, 다시 말하면 돼지꼬리를 달고 태어난 것과 같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권력을 상실한 후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다시는 전쟁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위해" 작은 황금 물고기를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고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식하고서, 아니 순환적인 고독을 누림으로써 고독을 치유하기로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묶여 있던 밤나무 아래서 고독한 시체로 발견된다.
'고독'은 부엔디아 가문이 위치하고, 가문을 지배하는 공통의 조건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심지어는 부엔디아 가문의 어머니인 우르술라조차도 고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소경이 된 그녀는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노쇠의 고독 속에 침잠해 아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과 마찬가지로 깊은 사색에 빠진다. 아들의 깊은 사색은 명상의 한 형태로 선택된, 실제적인 것인데, 적극적인 삶을 영위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우르술라의 침잠은 본의가 아니다. 이처럼 고독은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과 그의 어머니에게서 다른 효과를 유발하는데, 몽상가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고독 속에서 화려한 권력을 차츰차츰 잃어갔다면, 우르술라는 눈이 멀어짐으로써 고독 속에서 사물을 더 잘 보게 된다.
결혼에 의해 가족이 된 산따 소피아 델 라 삐에닷, 페르난다 델 까르삐오, 우연히 혈연관계를 맺게 되는 삘라르 떼르네라, 마우리시오 바빌로니아, 가족의 절친한 친구 멜키아데스, 헤리넬도 마르케스, 외국인으로서 부엔디아 가문 여자의 사랑을 얻어 마꼰도에 정착하려다 실패한 삐에뜨로 끄레스삐, 가스똔 등 모든 인물이 고독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부엔디아 가문의 집 자체, 가재도구, 화초, 나무, 잡풀, 새, 불개미, 노랑나비들까지도 고독한 존재로 나타난다. 사람들은 이런 고독을 피하기 위해, 고독을 향유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거나 강제로 죽고, 결국은 근친상간에 함몰된다.
쉽사리 눈에 띄지는 않지만, 마꼰도 주민 그 누구에게도 가톨릭은 심오한 믿음도, 세계관도 도덕심도 주지 않고, 행동의 규범도 아니다. 단지 하나의 사회적 관습으로, 외양을 중요시하는 의례와 형식주의만을 수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톨릭도 고독을 치유하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 미사에 참석해 재(灰)의 십자가를 이마에 그렸다가 영영 지워지지 않은 바람에 십자가가 표적이 되어 반대파에 의해 모두 차례차례 암살된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열일곱 아들 또한 가톨릭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한 결과물로, 고독한 운명을 대변하고 있다. 어떤 의미로 가톨릭은 죽음과 연계된 고독을 유발하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뭐니뭐니해도 고독과 관계된 가장 특징적인 면모는 이 작품의 마지막 세 페이지에 드러난다. 부엔디아 가문의 최후 생존자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는 개미 떼에 끌려가는 갓 태어난 아들의 몸을 보는 순간, 멜키아데스의 양피지에 적인 "가문 최초의 인간은 나무에 묶여 있고, 최후의 인간은 개미 밥이 되고 있다"는 제사(題詞)를 떠올리고는 자신의 운명이 양피지에 적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멜키아데스의 방에 처박혀 백년 전에 산스크리트어로 씌어진 부엔디아 가문의 역사를 해석한다. 그가 양피지의 해석을 마치는 순간 마꼰도(거울의 도시 또는 신기루)가 바람에 의해 부서져 인간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져버릴 것이고, "백년의 고독한 운명을 타고난 가문들은 이 지상에서 두 번째 기회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양피지에 적혀 있는 모든 것은 영원한 과거로부터 영원한 미래까지 반복되지 않는다고 예견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양피지를 읽는 행위는 그 자체로 반복할 수 없는 고독한 행위며 죽음의 행위가 되어 고독의 극치에 이른다. 말은 비극으로 끝나고 삶은 반복될 수 없으며, 한번 지나간 시간을 다시 시작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백년 뒤의 "사랑에 의해 비로소 삶을 받은 자"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끊어질 운명에 처해 있던 부엔디아 가문의 고독이 그들만의 업보가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의 업보가 된다. 어찌 보면 <백년의 고독> 속의 인물들은 사랑에 관해 무능함으로써 고독이라는 순환고리를 끊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의 운명, 다시 말해 라틴아메리카의 조건을 가장 잘 정의하는 고독이라는 개념은 사랑에 무능한 사람들의 '황폐'와 '단절'이라는 두 단어 사이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부엔디아 가문에서 우르술라 이구아란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은 성욕에 취해 있다. 특히 남자들은 삶을 성적인 욕망과 동일시한다. 그래서 성은 이들의 삶의 방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프랑스의 한 출판사가 마르셀 푸르스트와 함께 질문지를 만들어 "관대히 용서할 수 있는 실수가 무엇인가?"라고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 물었을 때, 그가 "허리 밑에서 저지르는 실수"라고 말했다시피, 인간에게 성은 권력과 더불어 기본적이고, 자연스럽고, 강력한 욕구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백년의 고독>에서는 성이 고독과 더불어 기능한다는 점에서 그 정도와 의미가 정상 범위를 넘고 있다. 성이 고독을 해소하고, 동시에 고독을 더욱 심화시키는 기재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백년의 고독>에 대한 독서에서 마꼰도 설립의 근원을 이루어 부엔디아 가문과 혈통의 고칠 수 없는 경향으로 지속되고, 결국에는 묵시록적인 재난을 유발하는 서사의 중심 모티프에 대한 언급이 없으면 불완전하다. 고독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근친상간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내 소설 <백년의 고독>에서 내게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근친상간에 의해 고착되어 있는 가족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백년의 고독>은 "백년의 근친상간"으로 치환될 수 있을 정도로 라틴아메리카 문화에 깊숙이 내재된 두 가지 현실, 즉 고독과 근친상간의 문제를 밀도 있게 다루고 있다. 따라서 부엔디아 가문의 모든 구성원을 가장 뚜렷하게 특징짓는 것은 바로 사랑의 주체와 대상이 한 가족에 속하는 근친상간에의 유혹이다. 그들 모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근친상간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근친상간의 내면에 바로 고독이 존재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텍스트의 순환적 리듬은 수많은 사건이 부엔디아 가문 인물들이 지니고 있는 고독의 가장 특징적인 면모인 근친상간과 연결되어 진행되면서 주기와 형태가 더욱 복잡해지는데, 이 리듬 속에 위치하는 근친상간과 그것의 금기는 부엔디아 가문의 기본 틀을 형성한다. 무엇보다도 근친상간으로 상징되는 도덕적 타락은 부엔디아 가문의 몰락을 재촉하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 유전학적 관점에서 볼 때 동종교배가 열등한 자손을 낳듯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 또한 근친상간이라는 동종교배를 통해 점점 더 열등한 자손을 낳고, 그 결과 부엔디아 가문이 멸망하고 마꼰도가 폐허로 변해 버린 것이다.
마꼰도 설립도 사촌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와 결혼한 우르술라가 근친상간으로 인해 돼지꼬리 달린 아이가 태어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부부생활을 거부하게 되고, 이를 비웃는 쁘루덴시오 아길라르를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가 죽임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근친상간의 결과에 대한 가공할 만한 공포로 인해 우르술라는 후손들에게 엄하게 경고하지만 근친혼 전통을 유지하던 가문의 삶에서 근친상간은 피할 수 없는 굴레이기 때문에 가문의 혈통에 흐르는 근친상간적 경향은 영원히 바로잡을 수 없다. 형 호세 아르까디오와 동생 아우렐리아노가 삘라르 떼르네라를 공유하고, 자매간인 레베까 - 비록 양녀이긴 하지만 - 와 아마란따는 삐에뜨로 끄레스삐를 동시에 사랑하고, 형제간인 호세 아르까디오 세군도와 아우렐리아노 세군도가 뻬뜨라 꼬떼스를 공유하며, 레베까는 친오빠처럼 함께 자란 호세 아르까디오와 결혼하고, 아마란따와 조카 아우렐리아노 호세도 근친상간 직전에까지 이른다.
결국 이모와 조카 사인인 아마란따 우르술라와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가 관계를 맺어 돼지꼬리 달린 자손을 낳고, 선조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치욕적인 종말을 고한다. 이 외에도 실제로 행해지지는 않지만 근친상간의 경향이 드러나는 관계 또한 많이 발견된다. 어머니 삘라르 떼르네라에 대한 아르까디오의 욕정, 미녀 레메디오스와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열일곱 아들 사이의 관계,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와 자신의 딸 레나따 레메디오스의 관계,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와 페르난다 사이에서 태어난 호세 아르까디오와 증고조할머니 아마란따와의 관계 등이 그것이다.
부엔디아 가문의 역사는 근친상간과 더불어 시작되고 혈통의 미로를 통해 여러 세대에 걸친 모색 후 순환이 완성되는 바, 결국 돼지꼬리 달린 아이와 거울로 이루어진 도시의 파괴는 인간이 꿈꾼 유토피아는 인간 자체가 자닌 악의 씨로 말미암아 성취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마꼰도는 서양 세계와의 진정한 족외혼적 관계를 설정하기 위한 시도에서 계속 실패함으로써 수세기 전부터 지속된 고독 속에 갇힌 채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완전하게 알지 못하는 자신의 근본에 관해 생각하는 라틴아메리카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 있다.
5. <백년의 고독>: 삶과 문학에 대한 진정한 화두
<백년의 고독>은 라틴아메리카의 창세기이며 묵시록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 작품을 통해 라틴아메리카적인 과거와 현재, 미래를 더욱 넓고 깊게 바라봄으로써 라틴아메리카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고, 초월적 지역주의, 다시 말하면, 좁게는 콜롬비아 넓게는 라틴아메리카라는 특정한 지역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도 보편성을 추구하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세계에 알린다. 즉 <백년의 고독>은 "우리의 현실을 타인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행위는 갈수록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갈수록 우리를 덜 자유롭게 하며, 갈수록 고독하게 만드는 데 이바지할 뿐"인 상황에서 "삶의 새롭고 활짝 개인 유토피아이며, 아무도 타인을 위해 심지어는 어떻게 죽어야 한다고까지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곳이며, 정말로 사랑이 확실하고 행복이 가능한 곳이고, 백년의 고독을 선고받은 가족들이 마침내, 그리고 영원히 이 지구상에 새로운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곳"인 진정한 유토피아를 창조하는 작업을 실행하기에 늦지 않았다고 믿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결과물, 즉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을 타파하기 위한 지난한 시도인 것이다.
라틴아메리카 인뿐만 아니라 세계인과 그들의 삶의 정수를 동시에 파악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과 시적 환상이 마술적으로 융합되어 있는 그의 소설 세계는 현실의 지평을 무한히 확장시키면서 20세기를 위협하는 부조리한 요소를 까발리고, 도덕적인 분노를 표출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주면서, 사랑을 통해 인간과 삶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재평가하도록 해 주면서 현대 사회의 삶과 문학에 새로운 좌표를 형성해 주고 있는 것이다.
<백년의 고독>이 출판된 지 30년이 넘었지만, 비평가들과 독자들이 라틴아메리카에서 태어난 소설, 멜키아데스의 양피지 안에 있는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처럼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던 문학적 거울인 이 소설에 여전히 놀라움과 감동을 표하고, 전율을 느끼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삶과 역사를 비추고 전망해 보는 이유는 <백년의 고독>이 작가의 의식 세계와 라틴아메리카라는 실체가 지니고 있는 복합적인 현실을 총정리한 소설로 그 대륙을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소설의 죽음'에 종지부를 찍고, 소설의 존재와 소설의 미래에 대한,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지한 화두일 수 있기 때문이다.
*
지금까지 몇 분의 전문 번역가가 각기 다른 외국어로 번역된 작품을 한국어로 중역해 널리 읽히고 있지만, 새삼스럽게 또다시 번역·출판하기로 한 이유는 기존의 번역서들에서 몇 가지 심각한 문제를 발견하고, 라틴아메리카 현대소설을 전공한 역자로서 책임감을 통감했기 때문이다. 역자는 스페인어로 씌어진 원본을 '가감 없이' 번역하고, 조영남 씨를 비롯한 민음사의 여러 편집자와 더불어 오류를 최대한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진한 부분이 남아 있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글쓰기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백년의 고독>이 독자들의 가슴에 깊이 자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역자의 책임이다.
조구호의 주요 역서
<백년의 고독>(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민음사 펴냄)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민음사 펴냄)
<해부학자>(페데리코 안다아시 지음, 문학동네 펴냄)
<책 파괴의 세계사>(페르난도 바에스 지음, 사티엘퍼블리싱 펴냄)
<룰루의 사랑>(알무데나 그란데스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과학의 나무>(피오 바로하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등.
기사 원문 보기
https://bre.is/VRRgy4Zx
[내가 옮긴 책]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만나다
번역자의 작업은 고독하다. 번역자의 삶 또한 고독하다. 나 자신을 '번역자'로 지칭하는 것이 타당한지 모르겠다. 번역이 온전한 밥벌이 수단도 아니고, 삶과 열정의 대부분을 번역에 투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이 다양한 내 작업 가운데 으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진실이다. 번역자는 번역 대상 서적을 맨 먼저, 가장 정확하게 읽는 독자가 되는 행운과 특권을 독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부를 졸업하고 유학지로 선택한 곳은 콜롬비아다. 아마도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1982년에 내게 유발한 흥분과 기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학원 강의실에서 교수들을 통해 만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일반' 작가가 아니었다. 그는 '가보(Gabo)'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박사학위 논문은 가르시아 마르케스에 관해 쓸까 생각했지만, 당시 같은 과에서 공부하던 중국인 학자가 선수를 치는 바람에 다른 작가를 선택해야 했다. 존경하던 저명 문학교수가 가르시아 마르케스에 필적하지만 크게 조명 받지 못하고 있던 동시대 콜롬비아 작가를 연구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해 줌으로써, 그때까지만 해도 나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인연은 그리 깊지 않았다.
귀국 후 우연한 기회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에 관한 논문을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글 쓰는 사람들 특유의 여유랄까, 게으름이랄까? 발표일이 코앞에 다가오는데도 논문을 쓰지 못하고 있다가 하는 수 없이 한국어 번역본을 찾았다. 당시 영어 등 외국어로 번역된 것을 한국어로 다시 옮긴 '중역본'이 여러 권 있었는데, 번역이 가장 잘 되었다고 평가받던 어느 판본을 읽게 되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나라이자, <백년의 고독>의 무대가 되는 콜롬비아에서 중남미 현대소설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바가 많았다.
▲ <백년의 고독>(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를 해결해 나가다
<백년의 고독>의 번역할 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왕이면 기존의 중역본들보다 '훨씬 좋은' 번역본을 만들어야 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소설을 쓰느냐, 죽느냐"라고 되뇌면서 결기를 다졌는데, 나는 죽고살기로 번역에 매달렸다.
<백년의 고독>은 마술적 사실주의를 표방하는 작품으로, 사실주의라는 말이 의미하는 역사성·재현성과 '마술적'이란 단어가 함축하는 글쓰기의 실험성을 내포하는데, 이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야 했다. 작업을 하면서 구체적인 몇 가지 문제를 늘 염두에 두었는데, 그 가운데 두어 개를 언급하겠다.
<백년의 고독>의 문체를 주도하는 '구전 전통'을 살리는 것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여덟 살까지 외가에 살면서 천부적인 이야기꾼 외조부모로부터 까리베 지역의 특이하고 경이로운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고, 이들 이야기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세계를 풍요롭게 만드는 요소가 되었다. '천일전쟁'에 참여했던 외할아버지는 외손자가 아우렐레아노 부엔디아 대령 같은 '위대한' 인물을 창조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 외할아버지는 "이야기와 실재를 연결시켜 주는 탯줄" 같은 존재였다. 특히 외할머니는 그 지역의 신화, 전설, 민담 등을 이야기해 주었는데, 환상적이고 기괴한 것들을 실재와 결합시키는 독특한 서사 방식은 거의 외할머니 덕분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외할머니를 '마술적 리얼리즘' 소설의 스토리텔링에 영감을 불어 넣어준 인물로 기억한다.
이들 이야기가 <백년의 고독>에 충분히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번역에도 이런 구전 전통이 잘 드러나야 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삶은 한 사람이 살아온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기억하는 것이고, 그 삶을 얘기하기 위해 어떻게 기억하느냐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시피, 나는 작가가 <백년의 고독>에 형상화해 놓은('어떻게') 기억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해 주고 싶었다.
아주 특이했던 부분은 아마란따가 유난히 '고상을 떠는' 올케 페르난다를 놀리면서 한 말이다. "-Esfetafa esfe defe lasfa quefe lesfe tifiefenenfe asfacofo afa sufu profopifiafa mifierfedafa." 난해한 수수께끼였다. 여러 번역본을 참조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영문판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다음과 같은 번역문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피 애패는 자파기피가 싼판 똥퐁에페도 구푸역펵질필을 할팔 그프런펀 여펴자파야." 원문에서는 선행하는 음절의 모음에 'f'를 합쳐 한 음절을 만든 뒤 선행하는 음절 뒤에 삽입시키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단음절을 구성하는 's'와 'n', 'r'의 경우는 무시했다). 원문에서 'f'와 모음이 결합된 음절을 삭제하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Esta es de las que les tienen asco a su propia mierda." 한글 번역본에서도 이 같은 방식을 따랐다. 그런데, 한국어는 에스빠냐 어와 달리 한 음절이 '자음+모음+자음'으로 구성될 수 있기 때문에, 즉 받침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한국어 번역문을 만든 뒤, 선행하는 음절의 받침을 붙였다. 물론, 이 문장에서 독자들이 상당 기간 나와 동일한 고뇌에 빠져 있다가 결국에는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힌트를 주었는데, 이는 바로 '는', '가', '도', '을', '야' 뒤에는 'ㅍ'음이 들어간 음절을 삽입하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다음 문장은 번역서에 제공되지 않았다. "이 애는 자기가 싼 똥에도 구역질을 할 그런 여자야."
마침표 없이 3쪽에 걸쳐 이어지는 문장을 원문처럼 한 문장으로 옮기는 것도 '고역'이었다. 당시 <번역의 테크닉>이라는 책에 실린, 문장을 자의적으로 끊지 말고, 쉼표와 마침표도 중요하게 여기라는 '지침'이 나를 향해 비수를 들이대고 있었다. 나는 기나긴 시간 동안 고민을 거듭하면서 번역문을 원문처럼 한 문장으로 만들어냈다. 만용이었을까?
번역자는 책이 계속 출간되는 한, 그 책에 시선을 주는 독자가 있는 한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법인가 보다. 번역을 하면서 'el mar del Japón'이라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일본 바다', 한자어로 쓰면 '일본해'다. 얼핏 '동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일 간의 민감한 영해 문제 때문에 동해로 번역해야 한다는, '애국적'인 생각도 했다. 하지만 번역자가 그 바다를 동해라고 특정할 수도 없고, 또 만에 하나 정말 동해라 할지라도, 작가가 사용한 어휘를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한국과 일본의 영해 문제를 알았을 턱이 없지만, 설사 일본 편을 들었을지라도 말이다. 문학 (연구)에서는 작가의 오류, 무지, 편견, 이데올로기, 특별한 의도 같은 것도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이야기에 관한한 "나는 하찮은 공증인에 불과하다"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입장을 나 또한 견지하고 싶었다. 아니다 다를까, 번역서가 출간된 지 십여 년이 지났을 때, '동해'를 '일본해'로 번역해 놓은 '비애국적이고 몰지각한' 역자가 어디 있느냐며, 강력하게 질타하는 몇몇 독자의 글과 전화가 출판사에 전해졌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한국 독자에게 '재미의 미학'을 전하다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구사하는 "언어의 엄밀성, 경제성, 완벽성은 단 한 마디도 넘치지 않는다. 그 안에는 모든 것이 촘촘하게, 간결하게 짜여 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자신의 표현 수단을 완벽하게 인지한 독창적인 작가다. 그의 수학적이고, 절제되고, 기능적인 서사는 화산처럼 분출되는 호흡 같은 스타일로, 상상력의 가장 대담한 창조물들에 동작, 매력,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강력하고 번쩍이는 강으로 변해 있다."
2010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바르가스 요사의 말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재미의 미학'을 통해 작품의 대중화를 꾀함으로써 일반 독자를 확보하고 비평가들에게는 새로운 소설미학을 제공한다. <백년의 고독>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재미의 미학'이 무엇인지 오랫동안, 제대로 알려주기를 소망한다.
<백년의 고독> 해설, 마꼰도와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에 대한 탐구
1. '소설의 죽음'에 반기를 든 <백년의 고독>
그 동안 세계 문학계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던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20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소위 '붐 Boom' 세대의 등장과 더불어 서서히 중심으로 이동하기 시작하고, 콜롬비아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ía Márquez, 1927~ )를 비롯해 멕시코의 까를로스 푸엔떼스, 페루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등 일군의 작가는 뛰어난 작품을 통해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역량을 전 세계에 과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1944년에 <집 La casa>이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쓰려고, 현재의 <백년의 고독>에 실려 있는 첫 행을 썼지만 자신이 하려는 얘기를 스스로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테크닉적·언어적 요소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완성된 작품'으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23년 동안 생각하고 18개월에 걸쳐 집필한 <백년의 고독>이 1967년 6월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수다메리까(Sudamérica) 출판사에서 출판되어 전 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진다.
<백년의 고독>이 출판되기 전 여러 잡지가 일부를 게재하고,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읽어보라고 건네준 제1장을 읽은 멕시코 저명 작가 까를로스 푸엔떼스도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비평가들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즉각적인 성공을 거둔 이 작품은 현기증 나는 속도로 재판이 이루어지고, 출판된 지 몇 개월 만에 유럽의 20여개 언어로, 현재는 세계의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독자들, 특히 '고갈의 위기'에 처해 있는 작가들의 애독서가 되고 있다.
이런 성공 덕분에 이탈리아에서는 치안치아노 상을 수상하고, 프랑스에서는 가장 뛰어난 외국 소설로 선정된다. 미국 비평가들은 1970년대의 가장 훌륭한 열두 권의 책 가운데 하나로 선정하고, 컬럼비아 대학은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한다. 1972년에 작가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권위 있는 로물로 가예고스 상을 수상하고, 1982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 작품으로 소위 '소설의 죽음'이라는 주장에 반기를 들게 하고, 결국은 밀란 쿤데라로 하여금 "소설의 종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서구 작가들, 특히 프랑스인들의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동유럽이나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에게는 어불성설이나 다름없다. 책꽂이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꽂아놓고 어떻게 소설의 죽음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라는 말로 소설의 부활에 대해 언급하도록 만든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문학은 이제 라틴아메리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문학에서 확고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의 영향을 받은 다른 작품들까지도 독자의 아낌없는 찬사를 받고 있다. 세계의 수많은 비평가는 이미 세계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고, 앞으로도 노력 여부에 따라 문학사를 바꿀 가능성이 예견되는 그의 눈부신 글쓰기가 세계문학사의 멋진 순간을 장식하면서 21세기를 여는 초석이 될 것임을 의심치 않고 있다.
2. 마술적 사실주의: 또 다른 리얼리즘의 극치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제대로, 멋지게 표현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방법을 모색하던 라틴아메리카 소설가들은 역사적·문학적으로 큰 혼란을 겪어온 라틴아메리카만의 독특한 문학적 산물인 '마술적 사실주의(Realismo mágico)'를 고안해 낸다. 중남미학자로서는 아르뚜로 우슬라르 삐에뜨리가 1948년에 처음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지만, 이것을 새로운 사조로 규정한 사람은 앙헬 플로레스다. 쿠바 작가 알레호 까르뻰띠에르가 '경이로운 사실(Lo real maravilloso)'이라는 용어로 정의한 '마술적 사실주의'는 사실과 환상, 사실과 허구가 초현실주의적 수법으로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형태를 말하는 것으로, 좁게는 리얼리즘의 한 유형, 넓게는 세계 인식의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충분히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현실을 실제의 삶보다 더욱 폭넓게 수용하는 라틴아메리카에게 현실이란 개인 심리적·사회적·수평적·역사적·외면적 측면뿐만 아니라 집단 심리적·민화적·미신적·환상적·추상적·수직적·탈시간적·내면적 측면까지 포함한다. 바꾸어 말하면, 죽음의 세계는 삶의 세계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고, 부재와 현존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의 동시적 속성이며, 환상과 실제 사이에는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현실은 불가시적 세계로 둘러싸인 포괄적인 전체를 뜻하기 때문에, 소설 속의 수많은 에피소드가 일상적인 것을 환상적으로, 환상적인 것을 일상적으로 구사하는 문체와 서사적 관점을 교묘하게 융합시키고 있기 때문에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자신의 소설에 첨가한 신화적인 요소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실, 즉 고독을 치유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이해될 수 있다.
<백년의 고독>은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환상과 사실을 격리시키는 벽을 제거하는 데 무척 고심한 작품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어린 시절 외가에서 잘랐는데, 미신을 믿고 신비로운 것을 좋아하던 외할머니는 어린 가브리엘에게 환상적이고도 터무니없는 것을 아주 자연스러운 말투로 얘기해주었고, 가브리엘은 환상과 경이로 가득 찬 옛날이야기의 세계에 흠뻑 젖은 채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렇듯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분석적이고 증언자적인 태도를 배제한 채 대신 유년기부터 들어온 전설이나 신화로 포화되어 있는 잠재의식의 인도를 받아 <백년의 고독>에 그만의 필체와 서사적 관점을 사용해 현실과 환상을 교묘하게 융합함으로써 특유의 제3 현실, 즉 총체적인 허구의 세계를 창조해 냈다. 이런 창조적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 제3 현실은 독자의 개념적 세계를 환상적 세계로 대치시킴으로써 독자의 무의식이나 잠재의식 속에 엄연한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백년의 고독>의 마술적 장치는 실제로 작품을 읽음으로써만 풀 수 있는데, 작품에 나타난 예를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팔팔 끓는 얼음', '죽은 사람이 나타나 살아 있는 사람처럼 활동하는 모습', '흙, 벽에서 긁은 석회를 먹고 사는 레베까', '항해 도중 바다에서 잡은 용의 뱃속에서 발견된 십자군 병정의 투구, 허리띠, 무기', '난로에 얹어둔 우유가 끓지 않아 주전자 뚜껑을 열었을 때, 주전자 안에 득실거리는 구더기', '담요나 양탄자를 타고 하늘로 날아가 영원히 사라져 버린 미녀', '돼지 꼬리를 달고 태어난 아이' 등이다. 호세 아르까디오의 죽음(한 발의 총성이 울리고) 뒤에 일어난 현상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호세 아르까디오가 침실문을 닫자마자 권총 소리가 집 안을 권총 소리가 집 안을 진동했다. 한 줄기 피가 문 밑으로 새어나와, 거실을 가로질러 거리로 나가, 울퉁불퉁한 보도를 통해 계속해서 똑바로 가서, 계단을 내려가고, 난간으로 올라가, 아라비아 인 거리를 통해 뻗어 나가다, 어느 길모퉁이에서 오른쪽으로 돌았다가, 다른 길모퉁이에서 왼쪽으로 돌아, 부엔디아 가문의 집 앞에서 직각으로 방향을 틀어 닫힌 문 밑으로 들어가서는 양탄자를 적시지 않으려고 벽을 타고 응접실을 건너, 계속해서 다른 거실을 건너고, 식당에 있던 식탁을 피하기 위해 넓게 우회해서 베고니아가 있는 복도를 통과해 나아가다, 아우렐리아노 호세에게 산수를 가르치고 있던 아마란따의 의자 밑을 들키지 않고 지나, 곡식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우르술라가 빵을 만들려고 달걀 서른여섯 개를 깨뜨릴 준비를 하고 있던 부엌에 나타났다."
작가는 바나나 농장 노동자들이 노동 조건과 생존권 문제를 놓고 벌인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13명이 죽은 사실을 3000명이 죽었다고 서술하는데, 이런 과장에 대해 백년 후에는 3000명이라는 환상적 숫자가 역사적 숫자로 믿어지고 13명이라는 역사적 숫자는 믿기 어려운 환상적 숫자로 퇴색할 것인 바, 그 때는 사람들이 역사보다는 자신의 픽션을 더 신뢰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역사적 사실을 그 사실과 유사한 이미지를 통해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영역으로 이끌어 들인다.
가르시아 마르케스 자신이 "작가보다는 마술사가 되고 싶었다"고 했던 말은 그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표현하기 위한 기재로 차용한 마술적 사실주의와 연관이 있을 법도 하다. 마술사처럼 하는 것, 즉 현실을 무한히 확대하고, 재해석하려는 그의 시도는 <백년의 고독>에서 충분히 탐지되는데, 이 허구적 세계는 마술에 의해, 마술 속에서, 마술로부터 생성되고 파괴된다.
3. 유토피아적 공간: 나선형적 시간
사람 하나를 죽임으로써 고향을 떠난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가 아무도 닿지 않는 곳에 건설해, 부엔디아 가문의 6대에 걸친 영고성쇠, 즉 고통, 절망, 사랑의 결여, 백년의 고독이 펼쳐지는 마꼰도는 콜롬비아의 오지(리오아차, 시에나가 그란데)와 신화(원죄 이전의 축축하고 고요한 낙원, 마법에 걸린 지역) 등에 뿌리를 박고 있다. '마꼰도'라는 이름은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첫 소설을 쓸 때인 1951년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는데, 이는 그의 고향 카리브 해 연안의 원시적인 마을 아라까따까에 있는, 자신이 어렸을 때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는 농장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마꼰도는 신화적 레벨에 있어서는 에덴의 은유를 내포하고 있는 죽음이 없는 세계이자,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적 맥락에서는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발견된 신대륙 아메리카를 상징한다. 이런 이중 구조 안에서 마꼰도라는 곳은 고독이 재배하는 곳으로 장치된다. 우선 마꼰도는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변두리 마을과 일반적인 지방을 대변한다. 그러나 초기의 단절과 고립으로부터 식민화, 미제국주의화로 이행되는, '일탈' 또는 '전도(顚倒)'의 역사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주민들이 그때까지 알고 있던 그 어떤 마을보다 잘 정비되고 부지런한 마을"인 마꼰도는 여러 면에서 '에덴동산(무릉도원, 유토피아)'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자원이 풍부하고 위기의식도 없으며, 그 누구도 사망한 적이 없는 낙원인 것이다. 원시적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마꼰도는 점차 현대문명과 제도의 침투를 받으며 몰락하기 시작하고, 고독에 휩싸인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이 거주하는 고독한 마을로 변해 백년이 흐른 뒤에 결국 소멸하고 만다.
이처럼 현실적이고 신화적인 공간 마꼰도는 '직선적(역사적)'이고 '원형적(신화적)'인 시간이 중첩·혼합된 시간 구조, 다시 말하면 '나선형' 시간 구조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백년의 고독>에 내재된 핵심 테마인 '고독'을 찾아내는 데 열쇠가 되는 것은 직선적으로 진행되는 역사, 즉 마을의 설립과 발전, 쇠퇴와 파괴라는 역사를 보완하고 소설의 시간적 차원을 확장시키며, 새로이 생명력 있게 펼쳐지는 확장된 현재의 꿈을 담아내는 나선형적 시간, 다시 말하면 연속성보다는 동시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돌고 도는 시간, 직선적인 시간을 보완하고 소설의 시간적 차원을 확장시키는 시간과 부엔디아 가문에 총체적으로 선고되어 있는 고독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부엔디아 가문의 역사, 소설의 '고독한' 시간적 메커니즘은 "끝없이 반복되는 하나의 톱니바퀴, 그 축이 서서히, 고칠 수 없을 정도로 마모되지 않는다면 영원히 계속해서 회전하는 하나의 바퀴"이기 때문이다.
<백년의 고독>에는 수많은 등장인물과 사건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지만 진지하게 읽어보면 지속적인 흐름, 즉 시·공간 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리듬과 패턴이 발견된다. 불멸성을 찾아다니는 길가메시의 모험, 오디세우스의 귀향, 영원성을 추구하는 연금술사의 자기실현 과정, 성배를 찾아 떠나는 기사 이야기, 디오니소스적 광란의 축제 등, 일류가 시간을 통해 쌓아 올린 모든 문학적 경험, 다시 말하면, 수많은 민속 모티브, 신화, 에피소드가 도처에 중층적으로 융합되어 있다. 여성 주인공들, 특히 도덕성의 화신인 우르술라, 풍요와 성의 여신에 비유될 수 있는 삘라르 떼르네라('삘라르 Pilar'는 '기둥', '축'을 의미하고, '떼르네라 Ternera'는 '암소'를 의미한다.), 아마라딴(출산의 여신이나 처녀로 남아 있는 그리스의 대모신(大母神) 아르테미스를 의미한다) 등은 위와 같은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백년의 고독>에서 나선형적 시·공간의 문제를 가장 잘 드러내는 상징적인 면모는 '이름짓기'에서 비롯된다. 부엔디아 가문의 남자 자손들은 아우렐리아노 또는 호세 아르까디오라는 이름을, 여자 자손들은 우르술라, 아마란따, 레메디오스라는 이름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호세 아르까디오라는 이름을 지닌 남자는 충동적이고 모험적인 특성을 띠고 있으며, 아우렐리아노라는 이름을 지닌 남자는 명민하고 은둔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들 이름은 생물학적·심리학적으로 동일한 패턴의 특성을 계승해 나간다.
아우렐리아노는 부엔디아 대령이 일으키거나 겪은 서른 두 번의 반란은 콜롬비아 독립 이후 끊임없이 진행되어 온 좌·우 이데올로기의 투쟁사를, 4년 11개월 2일간 지속된 대홍수와 10년 동안 지속된 가뭄은 '낙원'에서 저질러진 타락의 정화와 다가올 신생(新生), 그리고 그 신생에 대한 소망의 무참한 좌절을, 고독을 상징하고 있으며, 이밖에도 10년 주기로 3월이면 마을에 찾아오는 집시들, 불길한 일이 일어나는 화요일들, 부엔디아의 집에서 일상적으로 되풀이되는 수많은 사건 또한 시간의 동시성과 순환성, 그리고 그 속에 내재된 고독을 상징한다. 특히 신화 속의 페넬로페를 연상시키는 아마란따가 낮에는 수의를 짰다가 밤에는 푸는 행위와 아우렐리아노('아우렐리아노 Aureliano'는 어원학적·상징적인 의미에서 라틴어의 'aurum 황금'과 연관이 있다)가 고독을 지탱하기 위해 황금을 녹여 작은 물고기를 만들고, 황금 물고기를 팔아 벌어들인 금화를 녹여 황금 물고기를 만들다가, 마침내 팔기를 단념하고 순전히 만들기만을 위해 황금 물고기를 녹여 다시 황금 물고기를 만드는 행위는 시간의 순환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마꼰도라는 실제적인 공간과 소설이라는 공간(양피지라는 공간)이 아주 교묘하게 얽히고 설켜 있는 <백년의 고독>에서 나선형적 시간의 특성은 죽음 - 라틴아메리카 사회가 선고받은 것처럼 보이는 정체의 운명 또는 수동적인 혼수상태 - 으로부터 시작해 과거로 회귀하고, 더 나아가서는 현재를, 미래를 열고 정립하는 생명의 순환고리를 연결해가는 데 있다.
4. 고독, 섹스, 근친상간: 마꼰도와 부엔디아 가문의 인간조건
<백년의 고독>에서 가장 특징적인 인물들은 마꼰도의 설립자인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로, 고독이라는 기호는 그들의 몸과 영혼에 나 있는 상처이자 종양이자, 가족의 혈통 속에 녹아 있는 피할 수 없는 인자라고 할 수 있다.
부엔디아 가족 가운데서 가장 고독한 인물은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다. 그의 고독한 운명은 태어나기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어머니 우르술라가 노령에 이르면 생기는 통찰력으로 아우렐리아노 대령이 어머니 뱃속에서 울었던 것은 "그가 사랑하는 데 무능하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생각했던 걸" 기억했듯, 그는 모든 가족 중에서도 타인과의 우정이나 내밀한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이 가장 많은 인물이다. 고독하게 자란 그는 나중에 보수파와 자유파가 벌인 '천일전쟁'의 영웅으로서 엄청난 권력을 소유하게 되어 "이제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남자처럼 보였을 때"도 백묵으로 그린 원 안에 스스로 격리된 채 '무한한 권력의 고독 속'에 위치하게 된다. 어떤 때는 그의 명령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미리 실행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르술라는 그의 과도한 권력이 거의 완벽한 도덕적 타락을 의미한다고, 다시 말하면 돼지꼬리를 달고 태어난 것과 같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권력을 상실한 후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다시는 전쟁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위해" 작은 황금 물고기를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고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식하고서, 아니 순환적인 고독을 누림으로써 고독을 치유하기로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묶여 있던 밤나무 아래서 고독한 시체로 발견된다.
'고독'은 부엔디아 가문이 위치하고, 가문을 지배하는 공통의 조건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심지어는 부엔디아 가문의 어머니인 우르술라조차도 고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소경이 된 그녀는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노쇠의 고독 속에 침잠해 아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과 마찬가지로 깊은 사색에 빠진다. 아들의 깊은 사색은 명상의 한 형태로 선택된, 실제적인 것인데, 적극적인 삶을 영위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우르술라의 침잠은 본의가 아니다. 이처럼 고독은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과 그의 어머니에게서 다른 효과를 유발하는데, 몽상가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고독 속에서 화려한 권력을 차츰차츰 잃어갔다면, 우르술라는 눈이 멀어짐으로써 고독 속에서 사물을 더 잘 보게 된다.
결혼에 의해 가족이 된 산따 소피아 델 라 삐에닷, 페르난다 델 까르삐오, 우연히 혈연관계를 맺게 되는 삘라르 떼르네라, 마우리시오 바빌로니아, 가족의 절친한 친구 멜키아데스, 헤리넬도 마르케스, 외국인으로서 부엔디아 가문 여자의 사랑을 얻어 마꼰도에 정착하려다 실패한 삐에뜨로 끄레스삐, 가스똔 등 모든 인물이 고독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부엔디아 가문의 집 자체, 가재도구, 화초, 나무, 잡풀, 새, 불개미, 노랑나비들까지도 고독한 존재로 나타난다. 사람들은 이런 고독을 피하기 위해, 고독을 향유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거나 강제로 죽고, 결국은 근친상간에 함몰된다.
쉽사리 눈에 띄지는 않지만, 마꼰도 주민 그 누구에게도 가톨릭은 심오한 믿음도, 세계관도 도덕심도 주지 않고, 행동의 규범도 아니다. 단지 하나의 사회적 관습으로, 외양을 중요시하는 의례와 형식주의만을 수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톨릭도 고독을 치유하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 미사에 참석해 재(灰)의 십자가를 이마에 그렸다가 영영 지워지지 않은 바람에 십자가가 표적이 되어 반대파에 의해 모두 차례차례 암살된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열일곱 아들 또한 가톨릭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한 결과물로, 고독한 운명을 대변하고 있다. 어떤 의미로 가톨릭은 죽음과 연계된 고독을 유발하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뭐니뭐니해도 고독과 관계된 가장 특징적인 면모는 이 작품의 마지막 세 페이지에 드러난다. 부엔디아 가문의 최후 생존자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는 개미 떼에 끌려가는 갓 태어난 아들의 몸을 보는 순간, 멜키아데스의 양피지에 적인 "가문 최초의 인간은 나무에 묶여 있고, 최후의 인간은 개미 밥이 되고 있다"는 제사(題詞)를 떠올리고는 자신의 운명이 양피지에 적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멜키아데스의 방에 처박혀 백년 전에 산스크리트어로 씌어진 부엔디아 가문의 역사를 해석한다. 그가 양피지의 해석을 마치는 순간 마꼰도(거울의 도시 또는 신기루)가 바람에 의해 부서져 인간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져버릴 것이고, "백년의 고독한 운명을 타고난 가문들은 이 지상에서 두 번째 기회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양피지에 적혀 있는 모든 것은 영원한 과거로부터 영원한 미래까지 반복되지 않는다고 예견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양피지를 읽는 행위는 그 자체로 반복할 수 없는 고독한 행위며 죽음의 행위가 되어 고독의 극치에 이른다. 말은 비극으로 끝나고 삶은 반복될 수 없으며, 한번 지나간 시간을 다시 시작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백년 뒤의 "사랑에 의해 비로소 삶을 받은 자"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끊어질 운명에 처해 있던 부엔디아 가문의 고독이 그들만의 업보가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의 업보가 된다. 어찌 보면 <백년의 고독> 속의 인물들은 사랑에 관해 무능함으로써 고독이라는 순환고리를 끊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의 운명, 다시 말해 라틴아메리카의 조건을 가장 잘 정의하는 고독이라는 개념은 사랑에 무능한 사람들의 '황폐'와 '단절'이라는 두 단어 사이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부엔디아 가문에서 우르술라 이구아란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은 성욕에 취해 있다. 특히 남자들은 삶을 성적인 욕망과 동일시한다. 그래서 성은 이들의 삶의 방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프랑스의 한 출판사가 마르셀 푸르스트와 함께 질문지를 만들어 "관대히 용서할 수 있는 실수가 무엇인가?"라고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 물었을 때, 그가 "허리 밑에서 저지르는 실수"라고 말했다시피, 인간에게 성은 권력과 더불어 기본적이고, 자연스럽고, 강력한 욕구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백년의 고독>에서는 성이 고독과 더불어 기능한다는 점에서 그 정도와 의미가 정상 범위를 넘고 있다. 성이 고독을 해소하고, 동시에 고독을 더욱 심화시키는 기재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백년의 고독>에 대한 독서에서 마꼰도 설립의 근원을 이루어 부엔디아 가문과 혈통의 고칠 수 없는 경향으로 지속되고, 결국에는 묵시록적인 재난을 유발하는 서사의 중심 모티프에 대한 언급이 없으면 불완전하다. 고독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근친상간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내 소설 <백년의 고독>에서 내게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근친상간에 의해 고착되어 있는 가족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백년의 고독>은 "백년의 근친상간"으로 치환될 수 있을 정도로 라틴아메리카 문화에 깊숙이 내재된 두 가지 현실, 즉 고독과 근친상간의 문제를 밀도 있게 다루고 있다. 따라서 부엔디아 가문의 모든 구성원을 가장 뚜렷하게 특징짓는 것은 바로 사랑의 주체와 대상이 한 가족에 속하는 근친상간에의 유혹이다. 그들 모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근친상간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근친상간의 내면에 바로 고독이 존재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텍스트의 순환적 리듬은 수많은 사건이 부엔디아 가문 인물들이 지니고 있는 고독의 가장 특징적인 면모인 근친상간과 연결되어 진행되면서 주기와 형태가 더욱 복잡해지는데, 이 리듬 속에 위치하는 근친상간과 그것의 금기는 부엔디아 가문의 기본 틀을 형성한다. 무엇보다도 근친상간으로 상징되는 도덕적 타락은 부엔디아 가문의 몰락을 재촉하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 유전학적 관점에서 볼 때 동종교배가 열등한 자손을 낳듯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 또한 근친상간이라는 동종교배를 통해 점점 더 열등한 자손을 낳고, 그 결과 부엔디아 가문이 멸망하고 마꼰도가 폐허로 변해 버린 것이다.
마꼰도 설립도 사촌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와 결혼한 우르술라가 근친상간으로 인해 돼지꼬리 달린 아이가 태어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부부생활을 거부하게 되고, 이를 비웃는 쁘루덴시오 아길라르를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가 죽임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근친상간의 결과에 대한 가공할 만한 공포로 인해 우르술라는 후손들에게 엄하게 경고하지만 근친혼 전통을 유지하던 가문의 삶에서 근친상간은 피할 수 없는 굴레이기 때문에 가문의 혈통에 흐르는 근친상간적 경향은 영원히 바로잡을 수 없다. 형 호세 아르까디오와 동생 아우렐리아노가 삘라르 떼르네라를 공유하고, 자매간인 레베까 - 비록 양녀이긴 하지만 - 와 아마란따는 삐에뜨로 끄레스삐를 동시에 사랑하고, 형제간인 호세 아르까디오 세군도와 아우렐리아노 세군도가 뻬뜨라 꼬떼스를 공유하며, 레베까는 친오빠처럼 함께 자란 호세 아르까디오와 결혼하고, 아마란따와 조카 아우렐리아노 호세도 근친상간 직전에까지 이른다.
결국 이모와 조카 사인인 아마란따 우르술라와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가 관계를 맺어 돼지꼬리 달린 자손을 낳고, 선조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치욕적인 종말을 고한다. 이 외에도 실제로 행해지지는 않지만 근친상간의 경향이 드러나는 관계 또한 많이 발견된다. 어머니 삘라르 떼르네라에 대한 아르까디오의 욕정, 미녀 레메디오스와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열일곱 아들 사이의 관계,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와 자신의 딸 레나따 레메디오스의 관계,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와 페르난다 사이에서 태어난 호세 아르까디오와 증고조할머니 아마란따와의 관계 등이 그것이다.
부엔디아 가문의 역사는 근친상간과 더불어 시작되고 혈통의 미로를 통해 여러 세대에 걸친 모색 후 순환이 완성되는 바, 결국 돼지꼬리 달린 아이와 거울로 이루어진 도시의 파괴는 인간이 꿈꾼 유토피아는 인간 자체가 자닌 악의 씨로 말미암아 성취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마꼰도는 서양 세계와의 진정한 족외혼적 관계를 설정하기 위한 시도에서 계속 실패함으로써 수세기 전부터 지속된 고독 속에 갇힌 채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완전하게 알지 못하는 자신의 근본에 관해 생각하는 라틴아메리카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 있다.
5. <백년의 고독>: 삶과 문학에 대한 진정한 화두
<백년의 고독>은 라틴아메리카의 창세기이며 묵시록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 작품을 통해 라틴아메리카적인 과거와 현재, 미래를 더욱 넓고 깊게 바라봄으로써 라틴아메리카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고, 초월적 지역주의, 다시 말하면, 좁게는 콜롬비아 넓게는 라틴아메리카라는 특정한 지역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도 보편성을 추구하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세계에 알린다. 즉 <백년의 고독>은 "우리의 현실을 타인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행위는 갈수록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갈수록 우리를 덜 자유롭게 하며, 갈수록 고독하게 만드는 데 이바지할 뿐"인 상황에서 "삶의 새롭고 활짝 개인 유토피아이며, 아무도 타인을 위해 심지어는 어떻게 죽어야 한다고까지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곳이며, 정말로 사랑이 확실하고 행복이 가능한 곳이고, 백년의 고독을 선고받은 가족들이 마침내, 그리고 영원히 이 지구상에 새로운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곳"인 진정한 유토피아를 창조하는 작업을 실행하기에 늦지 않았다고 믿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결과물, 즉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을 타파하기 위한 지난한 시도인 것이다.
라틴아메리카 인뿐만 아니라 세계인과 그들의 삶의 정수를 동시에 파악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과 시적 환상이 마술적으로 융합되어 있는 그의 소설 세계는 현실의 지평을 무한히 확장시키면서 20세기를 위협하는 부조리한 요소를 까발리고, 도덕적인 분노를 표출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주면서, 사랑을 통해 인간과 삶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재평가하도록 해 주면서 현대 사회의 삶과 문학에 새로운 좌표를 형성해 주고 있는 것이다.
<백년의 고독>이 출판된 지 30년이 넘었지만, 비평가들과 독자들이 라틴아메리카에서 태어난 소설, 멜키아데스의 양피지 안에 있는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처럼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던 문학적 거울인 이 소설에 여전히 놀라움과 감동을 표하고, 전율을 느끼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삶과 역사를 비추고 전망해 보는 이유는 <백년의 고독>이 작가의 의식 세계와 라틴아메리카라는 실체가 지니고 있는 복합적인 현실을 총정리한 소설로 그 대륙을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소설의 죽음'에 종지부를 찍고, 소설의 존재와 소설의 미래에 대한,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지한 화두일 수 있기 때문이다.
*
지금까지 몇 분의 전문 번역가가 각기 다른 외국어로 번역된 작품을 한국어로 중역해 널리 읽히고 있지만, 새삼스럽게 또다시 번역·출판하기로 한 이유는 기존의 번역서들에서 몇 가지 심각한 문제를 발견하고, 라틴아메리카 현대소설을 전공한 역자로서 책임감을 통감했기 때문이다. 역자는 스페인어로 씌어진 원본을 '가감 없이' 번역하고, 조영남 씨를 비롯한 민음사의 여러 편집자와 더불어 오류를 최대한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진한 부분이 남아 있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글쓰기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백년의 고독>이 독자들의 가슴에 깊이 자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역자의 책임이다.
조구호의 주요 역서
<백년의 고독>(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민음사 펴냄)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민음사 펴냄)
<해부학자>(페데리코 안다아시 지음, 문학동네 펴냄)
<책 파괴의 세계사>(페르난도 바에스 지음, 사티엘퍼블리싱 펴냄)
<룰루의 사랑>(알무데나 그란데스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과학의 나무>(피오 바로하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등.
기사 원문 보기
https://bre.is/VRRgy4Zx